한국 골프는1897년 구한말에 함경남도 원산항의 대한민국 정부세관 관리로 와있던 영국인들이 세관안의 유목산에 6홀의 골프장이 만들어졌는데 주로 외국인관료와 선교사, 일본인들이 와서 즐겨 쳤다. 또한 1973년 원산 근처 갈마반도(葛麻半島)의 외인촌(外人村)과 황해도의 구미포(九味浦)에 외국인 전용 코스가 개설되었으나, 나무 울타리로 막아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 출입을 제한하였기에 그 규모를 기록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는 외교를 활발히 하던 때였다. 당시 주변국에 파견된 외교관은 자국에서 즐기던 전통 놀이인 골프를 전파하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영국인들과 미국인은 수교 국가에 골프장을 짓고, 골프를 즐겨쳤다. 당시 영국인들은세계 각지에 진출해 생활풍습상 거주하던 곳은 반드시 골프코스를 만들었던 점을 고려하면 위의 역사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진다.
1921년 조선 철도국은 철도국 직영의 조선호텔을 통해서 숙박객에 대한 서비스 및 외래객 유치의 목적으로 호텔 산하의 골프 코스를 유치할 것을 결정하고, 미국인 댄트의 코스 설계로 서울 효창공원에 길이 약 2,070m의 9홀 규모의 골프 코스가 건설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효창공원 골프장은 1923년 주변이 공원으로 지정됨에 따라 1924년 청량리로 옮겨 18홀 코스로 확장 이전되었다.
이후 철도국과 호텔로부터 골프장은 완전히 독립되었고, 1924년 새로운 경영을 시작할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를 설립하였다. 이후에 골프장은 순차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군자리(1929), 대구(1923), 부산(1932), 원산(1929), 평양(1928) 등에서 개장되었다.
1937년 경성 골프 구락부에서는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개최되며 규약과 임원 및 조직이 결성되었다. 최초의 한국인 골퍼는 1924년 청량리 골프장에서 탄생하였으며, 1929년에 개장한 군자리 골프장에서 본격적으로 한국 골퍼들이 경기를 개최하였다. 또한 군자리 골프장에서 최초의 캐디가 등장했다고 한다.
한국 골프는 주로 초창기에는 선교사나 외국인, 일본인 등이 골프경기를 즐겼다. 그래서 한국 골프의 실질적인 도입은 1929년 지금의 어린이 대공원 위치에 골프장이 건립되면서 부터라고 보는 것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군자리 골프장은 일본인의 추천이 있어야 한국인의 회원가입이 가능했다. 군자리 골프장은 태평양 전쟁이후 농경지로 바뀌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골프장은 다시 황무지로 변형되었다.
하지만 1954년 7월, 많은 우여곡절을 딛고, 군자리 골프장은 파72의 당시 국제규격으로 재복구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 11일, 최초의 골프장을 운영해 나갈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를 발족했다. 이후 군자리골프장에서 1954년 최초의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58년에 군자리골프장에서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한국골프는 1960년 기점으로 1976년 사이 국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골프장 수요도 같이 증가하게 된다. 골프장 건설은 주로 경제계를 이끄는 재일교포, 사업가 등이 정부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골프장 건설을 시작하였다. 이후 경제발전과 정치개혁으로 인해 늘어난 부유층과 특권층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골프가 수용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경제의 발전으로 많은 골프장이 건설될 조짐이 일어난다. 최초의 한양컨트리클럽(1964)을 시작으로, 태릉컨트리클럽(1966), 안양컨트리클럽(1968), 용인컨트리클럽(1970), 수원컨트리클럽(1975) 등 20여 개의 골프장이 건설되었으며, 그 후 골프코스건설은 서울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골프가 확산하여 가는 시점에 10여년간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1965년 9월 23일, 조국광복이후 최초로 한국골프협회가 출범하게 된것이다. 1965년 창간한 한국 골프 협회의 가장시급한 과제는 한국골프의 자리매김과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협회에서 국제 골프 연맹과 더불어 아시아 골프 연맹에 한국 골프 창립을 통고함으로써 국제 골프경기와 교류를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각종 국제 경기에도 한국 선수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한국프로골프협회에서는 1986년 연덕춘, 박명출, 배용산, 한장상, 이일안, 조태운 프로 골퍼들이 모여, '한국프로 골프 협회 창립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각종 국제대회와 국내 대회를 치르면서 프로 골퍼의 기술력 향상과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1986년 한국 프로 골프협회 제1차 이사회는 허정구이사를 의장으로 시작하여 개최됨에 한국프로골프협회 출범 제1호임원단의 구성이출범되었다. 또한명문 골프장의 합리적 운영과 골프를 통한 관광사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974년에 전국 골프장의 이장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 골프장 사업협회가 창립되었다. 이후 협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골프코스 건설 등, 골프 발전을 위한 지속적 활동은, 우리나라 골프가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프로선수의 양성과 더불어 한국 골프의 내로라 하는 선수들의 교육적 토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국 프로골퍼의 역사는 연덕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7세때 부터 골프를 배웠으며, 3년동안 일본에서 골프수업을 받으며 일본 오픈경기에 출전하여 8위에 입상하는 성장을 보인 후에1941년 한국인 처음으로 일본오픈 경기패권을 잡았다. 그의 밑에서 배출된 수많은 프로선수가운데 한장상은 1972년 일본 오픈경기에서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우승하였다.
한장상·김승학 팀은 1971년 미국에서 오픈한 월드컵 골프에 출전하여, 단체전 5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한장상이 한국에서 열린 한국 오픈경기에서 우승하였고, 김승학은 아시아 서킷 1차전인 필리핀 오픈경기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였다.
한장상은 이후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대회에 참가하였다. 마스터스 대회는 세계 4대 남자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이며, 4대 메이저 대회는 마스터스 대회(The Mastersds), 브리시티 대회(British open), PGA 챔피언십(PGA Championship), U.S. 오픈(U.S. Open)이 있다. 한장상은 마스터스 대회에 참가하였으며, 이 대회는 매년 4월 미국 조지아주의 오거스타내셔날(Auggsta National) 골프클럽에서 진행되는 대회로 전세계 골프인구가 관심을 가지는 대회이다.
또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여자 프로골퍼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구옥희는 미국과 일본에서 활약하여, 국제적으로 여자골퍼의 명성을떨치고, 원재숙, 고우순 등도 일본에서 뛰어난 기량을발휘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1990년대 이후부터는 바야흐로 한국의 여자골퍼가 세계의 위상을 떨치는 역사적 선수들이 등장한다.
1998년 19세의 젊은 나이로 U.S 여자 오픈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쾌거를 이룬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 IMF로 인해 국가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박세리 프로의 등장으로 한국 골프계는 전 세계에 한국 골프를 알리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1997년도 미국 LPGA에 데뷔하여 메이저 대회 5승을 포함하여, 통산 25승을 올리며, 2007년에 최고의 영예인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로 등극하였다. 이후 2013년 박세리 선수의 영향을 받아 박세리 키즈세대라 불리는 박인비, 최나연, 고진영, 전인지 등의 활약은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최정상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22년까지 세계 골프 순위 상위 10위안에는 많은 한국 선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있어 현재 한국 골프는 세계에서 인정받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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